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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완벽한 ‘소울 메이트’를 찾아서 헤매다

by 성공한 사막여우 2022. 2. 20.

 

 

 

바바라 대포 화이트헤드(Barbara Dafoe Whitehead)와 데이비드 파피노(David Popenoe)가 결혼에 대한 국민의식을 알아보기 위해 “남성들은 왜 헌신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실시한 의미심장한 연구 조사에서도 이런 기대의 실상을 또렷이 볼 수 있다.22 여성들은 종종 남성들을 겨냥해서 결혼을 두려워하는 ‘헌신 공포증’ 환자라고 비난한다. 보고서를 작성한 저자들은 실제로 “남성들의 태도를 조사한 결과, 그런 일반적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남성들이 결혼을 기피하거나 최대한 미루면서 내세우는 온갖 이유들을 열거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점은 ‘찰떡같이 들어맞는’ 상대, 이른바 ‘소울 메이트’를 만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한 남성이 허다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둘 사이에 공통점이 참 많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을 같이 읽었고, 온갖 이야기와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삶을 생각하는 방식과 기쁨을 느끼는 지점이 비슷했다. 우리는 서로가 참다운 ‘동지’로서 깊은 우정을 가꿔 갈 상대가 될 수 있음을 금방 감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화이트헤드와 파피노에 따르면, ‘찰떡같이 들어맞는 소울 메이트’가 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신체적인 매력과 성적인 끌림이다. 갓 이혼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샤피로 감독의 인터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황홀한 섹스가 얼마나 결정적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느 여성은 “그이가 끝내주는 남자인 줄 알고 결혼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속상하게도 남편은 갈수록 살이 붙었고 언제부터인가 외모를 가꾸지 않았다. 허니문은 그렇게 끝났다. 그 여성이 상대를 알아가는 통로는 섹스뿐이었다. 정말 원할 때만 성관계를 갖는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웬만해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기껏해야 한 번, 아니면 그 이하가 보통이었어요. 다양하지도 않고 정신적이나 정서적인 만족도 없었죠. 섹스를 황홀하게 만드는 조급함이나 긴장감,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든지 유혹하고 싶다는 감정 같은 것도 없고요.”

 

여성의 시각에서 성적인 매력과 끌리는 감정은 잘 맞는 상대를 고르는 기본 요건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성들은 성적인 매력을 넘버원으로 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바꾸려 들지 않는 짝”을 으뜸으로 쳤다. “이리저리 달라지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 삶에 맞춰 줄 수 있는’ 여성이 최상의 신붓감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남성은 단언했다. ‘정말 천생연분을 만났다면,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살던 대로 쭉 살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무엇이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가?    

 

이는 과거와의 중대한 단절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은 결혼에 ‘인격 개조’의 성격이 상당 부분 내포되어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 지난날에는 결혼을 통해 남자들을 ‘문명화’한다는 의식이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훨씬 독립적이어서 상호 커뮤니케이션과 지지, 또는 팀워크가 필요한 관계를 형성할 마음과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따라서 고전적인 결혼의 경우, 남자들에게 서로 의지하는 새로운 관계를 세워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결혼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결혼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도 남성들은 결혼이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라는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연구자들은 남성들을 인터뷰하면서 또래 여성들이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시점이 오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물었다. 응답자들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태도가 여성 파트너들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잘 알지만 안타깝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느 남성의 말처럼 “그건 여자들 사정”이라는 식이었다. 조사에 응한 대다수 남성들은 여성과의 관계가 눈곱만큼이라도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동거는 남성들로 하여금 집 안에서 안정적이고도 간편하게 여자 친구의 성적인 봉사를 받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층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며 계속 더 나은 파트너를 물색하는 여건을 제공한다.”26    <뉴욕 타임스>의 기명 칼럼에서 사라 립튼(Sara Lipton)은 성적으로 배우자에게 묶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행적을 보이는 기혼 정치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마크 샌포드, 존 엔자인, 엘리엇 스피처, 뉴트 깅리치, 빌 클린턴, 앤터니 위너 같은 이들이 거론되었다. 자연적인 본능을 변화시키고, 격정을 통제하며, 개인적인 욕구를 부정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전통적인 결혼의 목적에 하나같이 반기를 든 인물들이었다.    흔히들 본래 결혼이라는 것이 남자들의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런 행태를 설명하곤 한다. 사내다운 남성일수록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하다고도 한다. “잘난 남자들에게는 성적인 정복욕, 여성들의 넘치는 찬사,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위험한 정사 따위가 투지와 야망, 자신감과 함께 붙어 다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립튼은 예로부터 결혼이야말로 남자가 진정으로 남자다워지는 무대였다고 주장한다. “서구 역사 전반에 걸쳐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으뜸 덕목은 절제였다. …지나치게 음식이나 술, 잠, 섹스를 밝히는 사내는 치국(治國)은커녕 제가(齊家)도 못할 인물로 평가되었다.”    

 

 

뉴욕 주립 대학 스토니브룩 캠퍼스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립튼 교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선출직 공무원들의 신중하지 못하고 방탕한 성적 일탈행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로되는 현실을 대하고 보니, 한때 성적인 기량보다 성적인 자제력을 남자다움의 척도로 여기던 시절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에 관한 태도 변화의 책임을 남자들에게만 지우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오늘날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 자신을 ‘생긴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는 상대방과 결혼하기를 갈망한다. 그 안에서 정서적이고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다. 그들은 재미있고, 지적인 자극을 주며, 성적인 매력이 흘러넘치고, 여러 가지 관심사들을 공유하며 개인적인 목표와 현재의 생활방식을 지지해 줄 배우자를 바란다. 젊은이들은 큰 폭으로 달라져야 한다든지 그러길 요구하지 않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행복하고, 건강하며, 유쾌하고, 삶에 만족하는 환상적인 인간을 수소문하는 셈이다.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이상적인 기준을 세우고 배우자를 찾는 이들이 사회를 가득 채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맞는 상대와 결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해법이 있을까? 결혼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이 시대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딜레마를 바로잡을 방법까지도 듣게 될 것이다.    성경은 딱 맞는 짝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것이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는 이유를 들려준다. 목회를 하다 보니 결혼하려고, 또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아니면 파국으로 치닫는 부부 관계를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커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그들에게서 “사랑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애정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하지 않나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다. 내 쪽의 대꾸도 늘 비슷하다. “사랑만 그럴까요?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는 이들은 ‘빠른 공을 쳐내기가 이토록 힘들 줄 몰랐어!’라고 푸념하지않을까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위대한 작품을 쓰고 싶은 소설가라면 ‘그럴듯한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줄거리를 구상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우리라고는 생각 못했네!’라고 한탄하지 않을까요?” 상대방은 빤한 반응을 보인다. “야구나 문학 작품 얘기가 아니잖아요. 이건 사랑 문제라고요. 두 사람이 천생배필이라면, 소위 소울 메이트라면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나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은 ‘딱 맞는 짝’ 같은 것은 애당초 없다는 것이다. 듀크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스탠리 하우어바스(Stanley Hauerwas) 교수는 그 점을 지적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혼과 가정을 주로 개인의 성취를 도모하기 위한, 다시 말해서 ‘온전해지고’ 행복해지는 데 꼭 필요한 제도로 가정하는 자기실현 윤리는 부부 생활에 지극히 해롭다. 여기에는 세상 어딘가에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결혼 상대가 있어서 잘 찾아보면 기필코 만나게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결혼의 결정적인 일면을 간과하는 윤리적 가설이다. 누구나 부적절한 요소를 가진 상대와 혼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도 결혼 상대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다만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처음엔 확실하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세상만사가 대부분 그렇듯, 결혼도 일단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법이다. 중요한 건 더불어 살게 된 낯선 상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33    하우어바스는 완벽하게 잘 맞는 소울 메이트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꼬집어 지적한다. 결혼은 한 인간을 또 다른 존재와 밀접하게 묶어 주는 것이다. 결혼 관계만큼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관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누군가와 결혼하는 순간, 당사자는 물론이고 배우자 또한 엄청난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실제로 살아보기 전까지는 앞길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대가 어떤 인간으로 모할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