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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은 현실이다

by 성공한 사막여우 2022. 2. 20.

 

결혼하면 불행해질 것 같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듣는다. 결혼식에서, 교회에서, 유년 주일 학교에서 우리가 들었던 결혼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본다면 세상에 뿌려진 청첩장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양이 될 것이다. 결혼에는 다양한 양상이 존재함에도 사람들은 오직 감정적인 면만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결혼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고단한 과정이기도 하다. 가슴 벅찬 환희와 샘솟는 기운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피와 땀, 눈물, 참담한 패배와 상처뿐인 승리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결혼 중에 몇 주를 넘긴 결혼 치고 동화 속 이야기 같은 결혼은 없다. 그러니 대다수 부부들은 온종일 서로를 이해하려는 길고도 힘든 씨름을 벌이다 잠자리에 누워 탄식한다. “그래 결혼은 엄청난 미스터리야. 도무지 모르겠어!” 더러는 결혼이 마치 풀리지 않는 퍼즐이나 한번 들어가면 길을 잃고 마는 미로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사정들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인간관계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첫 번째 결혼을 주재하셨다(창 2:22-25)고 말한다. 여자를 본 남자는 “드디어!”라는 탄성과 함께 시를 쏟아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 결혼 제도야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심오한 관계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는 배우자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경이로운 일인 까닭이다.    

 

한없이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근사한 일, 이것이 성경의 결혼관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런 결혼의 정신을 드높이며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점이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결혼    지난 40년 동안, 미국의 ‘결혼 선행 지표’(leading marriage indicators, 결혼 건전성과 만족도를 나타내는 실증적 자료)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 왔다.

 

이혼율은 1960년대의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2 1970년대만 해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신생아의 비율이 89퍼센트였지만 지금은 60퍼센트 정도에 그친다.3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사실은 1960년대에는 미국 내 성인 중 72퍼센트가 결혼을 했지만 2008년에 와서는 50퍼센트 어간에 머문다는 점이다.

 

이런 지표들은 결혼에 대한 경계심과 비관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문화 속에,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 점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젊은이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미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부들조차도 성적(性的)으로 따분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코미디언 크리스 록(Chris Rock)이 던진 질문 그대로다. “싱글로 외롭게 사시겠어요? 아니면 결혼해서 지겹게 사실래요?” 상당수 젊은이들은 이 두 가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결혼과 단순히 성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만남 사이의 중간 지점(성 파트너와 동거하는 형식)을 오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30년 간, 그런 관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제는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택한다. 1960년대에는 문자 그대로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25세부터 39세 사이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 가운데 4분의 1이 이성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60퍼센트 정도는 30대 후반부터 그런 생활을 시작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몇 가지 믿음들 때문이다.    

 

 

우선 결혼 생활은 십중팔구 불행하다는 편견이다. 이 편견은 결혼의 50퍼센트는 이혼으로 마무리되며 나머지 절반 중에서도 비참하게 사는 경우가 상당수에 이르는 현실이 그 근거가 된다. 따라서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아보는 것이 보다 나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인지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동거를 통해 상대에게 정말 끌리는지, 이른바 ‘화학반응’이 충분한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갤럽이 실시한 ‘결혼에 관한 국민 의식 조사’에서 한 남성은 이렇게 밝혔다.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살아보지 않고 서둘러 결혼부터 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금방 이혼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신념이나 가정들에 내재된 문제점은 그것들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는 데 있다.    결혼이 주는 엄청난 유익들    갤럽 조사에 응답한 젊은이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혼전 동거 커플들은 결혼한 뒤에 결별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커플보다 더 높다.”7 부모의 이혼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가진 이들이 동거를 선택하는 것은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현실로 드러난 결과를 보자면, ‘동거’라는 처방은 질병처럼 치부되고 있는 결혼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흔히 접하게 되는 또 다른 가정 역시 잘못되긴 마찬가지다. 결혼한 부부의 45퍼센트가 이혼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혼전 임신을 한 커플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교육 과정을 잘 마치고 적절한 수입이 있으며, 온전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가졌으며, 25세 이후에 결혼해서 첫 아기를 낳은 부부의 이혼율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 전 동거를 선택하는 데는 경제적인 이유도 크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 집 한 칸이라도 장만할 여유가 있을 때 결혼을 하겠다는 의도다. 결혼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마련이라는 전제가 깔린 이야기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는 이른바 “결혼이 가져오는 놀라운 경제적 이익”이 있음을 보여 준다. 1992년에 나온 은퇴자 현황 조사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결혼 생활을 해온 이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평생 결혼한 적이 없거나 이혼한 뒤에 재혼하지 않은 이들보다 재정 상태가 평균 75퍼센트 정도 더 양호하다고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결혼한 남성의 경우 비슷한 교육 수준과 경력을 가진 다른 이들보다 10-40퍼센트 정도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결혼한 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도 여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아울러 결혼은 절망적인 상황이나 질병을 포함해 여러 어려움들을 무난히 처리하도록 돕는 고성능 ‘충격 흡수 장치’를 제공한다. 그만큼 신속하게 평형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입이 늘어나는 요인은 아마도 학자들이 ‘부부간의 사회 규범’이라고 부르는 데 있을 것이다. 연구 결과들을 보면 부부는 서로를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책임감과 자기 훈련을 습득하게 된다.

 

 

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반응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싱글들은 누군가 책임져 주는 이가 없으므로 내키는 대로 무분별하게 돈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결혼한 이들은 서로를 위해 눈앞의 즐거움을 미루고 저금이나 투자를 하게 된다. 그 어느 것도 결혼처럼 성품을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주저하는 주요인은 대다수 부부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는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본보기가 될 만한 글 한 편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야후의 <토론마당>에 스물네 살 된 남성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포스트를 올렸다. 지난 몇 달 동안 기혼 친구들에게 그런 얘길 했더니 다들 웃음을 터트리며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정말 똑똑한 생각이란 칭찬도 받았다. 청년은 기혼남녀 가운데 적어도 70퍼센트는 불행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젊은 여성은 그 근거 없는 이야기에 동의하는 댓글을 달았다. 자기 주위의 결혼한 이들을 되짚어 보면 딱 들어맞는 수치라는 것이다. 

 

“부부 열 쌍 가운데… 일곱은 지옥 못지않게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로 운을 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년에 결혼할 작정이다. 약혼자를 사랑하지만 형편이 달라지면 주저 없이 갈라설 것이다.”

 

최근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데이나 애덤 샤피로(Dana Adam Shapiro)의 신작 영화, <모노거미(Monogamy)>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13 2008년, 감독은 30대 어간의 기혼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가 파경을 맞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면서, 샤피로는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육성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자신의 결혼 관계가 해체되는 것을 지켜본 이들과 50건에 이르는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행복한 결혼에 관해서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까닭을 묻는 기자에게 감독은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했다. “행복한 부부들은 죄다 똑같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지루할 따름이다.”

 

기자는 이렇게 글을 맺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종말론적인 시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음울한 눈으로 관계를 바라보고 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화는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두 사람을 그리고 있다. 감독은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두 현대인이 상대방의 개인성과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더없이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기자는 이를 두고, 언젠가 결혼할 작정이고 이번 영화가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스스로 결혼 생활을 꾸려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샤피로 감독은 일부일처제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힘든’ 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영화는 미국의 청년층, 특히 도시화가 훨씬 더 진전된 지역의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맨해튼에서 수천 명의 싱글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세상의 뭇 미혼남녀들처럼 부정적인 결혼관을 가진 수많은 남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들 역시 행복한 결혼의 가능성을 한없이 낮춰 잡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지만 관련 연구들은 하나 같이 부부들 가운데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며(61-62퍼센트) 지난 10년 동안 그 수치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장기간에 걸친 추적 조사 결과는 더욱 놀랍다. 당장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부라 할지라도 이혼하지 않고 결혼 상태를 유지하면 적어도 3분의 2정도는 5년 안에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의 린다 웨이트(Linda J. Waite) 교수는 “이혼이 주는 유익이 지나치게 홍보된 감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20년 동안만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들의 생활 만족도가 싱글이나 이혼자, 또는 동거 상태인 이들보다 현저하게 높다는 증거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울러 대다수 부부들이 결혼 생활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커플들이라 할지라도 이혼하지 않으면 차츰 만족스러운 관계로 회복하게 됨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친구들보다 두세 배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도 여실히 드러났다. 따라서 결혼한다는 것과 결혼한 부모와 더불어 자라는 것이 행복의 크기를 부풀리는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결론에 대해서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결혼의 역사가 바뀌고 있다    

너나없이 결혼이 바람직한 일이며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나온 ‘결혼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 보고서’는 이런 결론을 내놓는다. “고등학교 상급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여학생과 3분의 1을 살짝 웃도는 남학생들만이… 혼자 살거나 다른 방도를 취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는 결혼하는 편이 싱글로 남거나 누군가와 동거만 하는 것에 비해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훨씬 유익함을 일관되게 보여 주는 온갖 실증적 증거들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보고서는 대다수 청소년들이 가진 결혼관은 이전 세대의 공감을 얻지 못하며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의 가르침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 축적한 최신 증거들과도 상충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런 비관론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현실과 멀찌감치 떨어지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결혼에 대한 비관적인 사고방식은 새로운 형태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현대 문화가 결혼을 이해하는 방식이 큰 폭으로 변하면서 생긴 현상이란 뜻이다. 법학자 존 위트 주니어(John Witte, Jr.)는 “지난날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던 ‘서로 사랑하고 후손을 낳으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영구적으로 약정된 연합’이라는 결혼의 이상은 차츰 물러가고 ‘양쪽 당사자의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기 위한 한시적인 성적 계약’이라는 새로운 현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트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 문명에는 결혼의 ‘형태와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두고 몇 갈래 대립되는 관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시각이다. 각론에서는 몇 가지 차이점들이 드러나지만, 두 진영 모두 남편과 아내가 평생 사랑하고 헌신하는 틀을 만드는 데 결혼의 목적이 있다고 가르친다. 두 남녀가 사사로운 충동과 관심을 억누르고 좋은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고(가톨릭의 강조점) 공공의 유익을 도모하도록(프로테스탄트의 강조점)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결혼을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평생 지속되는 결혼 관계가 자녀들이 잘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회적 안정을 제공하는 제도라고 인식한다. 사회가 결혼이란 틀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던 이유는 가정만큼 아이들을 잘 양육할 만한 환경이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지배했던 18-19세기부터 전혀 다른 결혼관이 등장했다는 것이 위트의 설명이다. 이전의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의무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저마다 부여받은 사회적 역할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흐름이 달라졌다. 인격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선택하는 자유와 그 결과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며, 배우자와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데서 정체감을 구하는 대신, 결혼을 통해 정서적이고 성적인 만족을 얻고 자아를 실현하는 마당으로 그 가치를 다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혼의 핵심이 거룩한 상징이라든지 더 넓은 인간 집단에 유익을 끼치도록 하나님이 주신 사회적 연대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도리어 개인적인 만족을 도모하기 위해 양쪽 당사자가 맺은 계약으로 인식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부부는 하나님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결혼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남편이든 아내든, 교회나 전통, 또는 더 넓은 공동체가 요구함직한 책임 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에게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방식으로만 결혼 생활을 이끌어 가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계몽주의는 결혼의 공적인 측면을 잘라내어 사유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거나, 또 다른 인격체를 빚어내거나, 자녀를 키우는 일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그 의미를 다시 규정한다. 새로운 결혼관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구 문화의 주류가 되면서 구시대의 시각을 몰아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강한 자의식이 들어 있다. 최근 칼럼니스트 타라 패커 포프(Tara Packer-Pope)는 <뉴욕 타임스>에 “행복한 결혼이란 ‘나’만을 내세우는 결혼인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부부가 모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결혼이 최고라는 의식은 반직관적인 듯하다. 결혼이란 본질적으로 관계를 으뜸으로 여기게 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은 결혼을 경제사회적 제도로 보아 왔으며 배우자의 정서적, 지적 욕구는 그 제도가 존속하는 데 부차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관계를 맺으면서 파트너십을 추구하며 삶을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줄… 그러니까 제각기 가치를 두는 목표에 도달하도록 도와줄 동반자를 구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다. 패커 포프는 한 점 가감 없이 그 실상을 그려낸다. 지난날 결혼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공적인 제도로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사로운 계약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중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게 달라진 관점은 결혼에 대한 기대 수준을 끌어올려 배우자에게 치명적인 부담을 안기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전통적인 결혼관으로는 상상조차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결혼에 대한 비현실적인 동경과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감 사이에서 절박하게 허우적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